2년 전 나처럼, 엄마의 껌딱지로 살아가는 친구가 있다. 사실 서로가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엄마의 병환과 요양으로 엄마 곁에 딱 붙어 살았던 경험만으로도 설명이 필요없이 서로를 이해할 만한 경험을 나눈 사이가 되었고 부쩍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실제로는 언니뻘 나이인 그녀가 친구처럼 느껴진다.
10년이 넘은 엄마의 오랜 투병, 최근 3년간의 밀착 간병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수시로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는 엄마의 건강상태는 친구와 전화를 붙들고 밤을 잊은 긴 수다로 마음을 털어놓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저 나는 이따금씩 친구와 가족의 안부를 묻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좋은 음악을 보내줄 뿐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하더라도 받지 않으면 받지 못하는 상황이겠거니 하며 넘기곤 했었다.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나 문자 답장이 며칠 혹은 1주일이 걸려도 서운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화나 문자가 자유롭지 못한 친구의 상황이 못내 마음에 걸려 더욱 기도가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친구와 요사이 하루가 멀다하고 문자와 전화가 오고가고 있다. 2주 전, 친구의 엄마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시게 된 이후부터 연락을 주고 받는 주기가 짧아진 것이다. 짧게라도 목소리를 듣고 직접 안부를 묻고 일상을 나누고 있다. 6월 초만 해도 아픈 중에도 회사 업무를 보셨다는 친구 엄마가 중환자실에 누워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는 가족들과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지만,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이시고 친구 역시 엄마의 회복을 바라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다.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에 대한 의지와 회복을 바라는 소망에 내 마음과 기도를 보태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바람이 나와 친구를 강하게 엮어주고 있다. 서울, 경기, 대전으로, 엄마를 치료해주는 병원을 전전하며 무수히 많은 밤을 눈물과 기도로 지새는 친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다. 감사하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바래 봅니다.
그대를 위해 기도합니다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바램이 닿을 수 있게 닫혀진 문이 서서히 열려
상처에 울고 때론 지쳐서 절망에 갇혀 아프지 않길 마음을 다해 그대의 위로가 되길 오늘도 나는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