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학창시절, 문득 내 가슴에 들어온 시가 있었는데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였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때는 시 몇편 외울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낭만적이기도 했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연히 알게 된 이 시를 입에 붙도록 익숙하게 외운다는 것이 아주 뿌듯했었다. 누군가 시 낭송을 시키는 것도, 그런 자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빨갛고 노랗게 물든 가을의 한 복판을 걷다가 그 풍경에 걸맞는 시 한자락 외우며 혼잣말하듯 가을을 곱씹어 즐기는 것이 나름의 낭만이었다. 지난 주말부터 불현듯 찾아온 감기가 잔뜩 들러붙어있지만, 병원과 약국을 오가는 골목길에도 가을은 찾아왔길래, 으레 가을의 기도를 다시 한번 외워본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부르다 보면 어제가 올까 그립던 날이 참 많았는데 저 멀리 반짝이다 아련히 멀어져 가는 너는 작은 별 같아